자유의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자유의지’란 선악과의 대두로 인하여 발현된 사람의 상대적 사고에서 기인한 마음입니다.
선악과 없이 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먹지 말라’가 선이고, 그것을 어기는 것이 악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단지 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법을 행하였으므로 벌을 받은 것입니다.

에덴 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의 발현’이란 부인이 안 된 ‘자기’가 주변의 여러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한 자기의 분별력과 그로 인한 선택을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하든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든지를 결정하는 기능적 사고입니다.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취향으로써의 선택이나 판단은 말씀 안의 ‘자유의지’의 기능과 또 그 부여하신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고 판단 능력이지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유의지’의 발동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는 반드시 선과 악, 그것도 윤리나 도덕적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거나 그릇되다고 하시는 선과 악의 기준 하에서만 발동되는 기능입니다.
아벨의 제사법이 있을 때에는 ‘제사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
‘ 하는 것, 즉 “양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곡식으로 할 것인가?
“를 판단함에 있어서 그 자유의지 기능이 작용을 하여 가인은 악을 택하고
아벨은 선을 택하는 결과를 냈습니다.

그리고 모세율법 하에서는 “모세율법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에 작용을 하는 마음이 자유의지의 발현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이후에 그 기준은 “성령의 법”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하게 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법이 없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과 악의 분별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자유의지가 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은 모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자유의지는 발현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도 다 악인데 어찌 그 악 속에서 자유의지가 발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선과 악의 기준을 모르고 하는 모든 일련의 행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행하는 하나님의 선에 속한 일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에 속한 것이라도 실상은 악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귀를 돌이키면 그 기도도 가증하니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타인이 생각하기에도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선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다.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을 모르는 사람이 그 기도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바라는 내용은 반드시 악,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세상에 속한 행사를 악하다 하므로 저희가 나를 미워한다” 하신 말씀에서의 “세상에 속한 일”을 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가증함을 보이는 것이 됩니다.

그런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무릎으로 사는 사람’ 이라고 하며, 낮아지라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는 의미의 ‘그리스도인의 리더쉽’ 이라는 개념을 말하기도 하면서, 소위 ‘세상에서 잘 나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모든 글과 말들이 실은 모두 악에 속한 말과 글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 곧 성령의 법, 선과 악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선처럼 보이는 것들이라도 모두 하나님께는 가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인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나 분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라고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성령의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란 절대로 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한 것은 기식이 없는 물건의 상태에 불과합니다.

성경에는 티끌과 같다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또 미물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무생물’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물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흙과 성령의 법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만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하루 일과를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도 일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그 만물의 일과에 따라 움직입니다.
어떤 땅은 마른 땅이고, 어떤 땅은 기름집니다.
마른 땅에 물을 대고 거름을 주면 그 땅은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사막이라도 모래에게 일과는 있으며 그 속에서 그 일과를 따라 살아가는 생물들도 있습니다. 하늘은 어떠합니까?
그 역시 일과가 있습니다.
전도서는 보이지 않는 바람이 이리저리 불다가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 일과로 인하여 사람의 일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전도서 초장에는 “만물은 이제 있는 것이 오래 전에도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반복하므로 피곤하다.”라고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무생물로 분류하고 있는 물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흙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도 그 흙으로 지어졌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중에 ‘사람’이라는 흙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사고하는 능력이 있어서 영을 살리는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을 보고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을 알아서, 육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여기고 “영이 사는 길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흙으로 살다가 흙으로 그대로 남을 것이냐?
“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때에 작용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인 것입니다.

영이 사는 길을 택하여 가는 자, 영이 살아나는 자만이 ‘기식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코로 호흡하는 모든 것이 기식이 있는 것,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기식 있는 사람, 곧 아담으로 자라가시기를 바랍니다.